處士)적 위상을 갖고 있던 인물들은 북벌(北伐)론의 비현실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북벌론의 의미와 효종의 정신을 기념하면서 북벌론을 역사화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북벌론에 대한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이 전대에 비해 점점 더 확산되고 있었다. 명나라에 대한 은혜
處士歌)>, <태부가(怠婦歌)> 등의 노래가 더 있었다는 동학의 기록을 들어 이와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먼저 <<용담유사>>와 관련된 동학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거의 일 년 가까이 수련을 하니 자연 아님이 없다. 이에 <용담가>를 짓고 또 <처사가>를 짓고 <교훈가>, <안
處士 또는 學生」이라 쓴다. 부인에게도 봉호(封號)가 있으면 봉호를 쓰고 봉호가 없을 때는 「孺人某貫某氏(例-孺人淸州韓氏)」라 쓴다. 18세 미만에 죽은 자식은 「亡子秀才(士)」라 쓰고 남편은 「顯(현벽)」이라 쓰며 백중숙부모(伯仲叔父母)에게는 「伯仲叔父母 또는 伯仲叔考」라고 쓴다. 또 지방
處士歌·襄陽歌·梅花歌 등 12노래를 이른다.
이들 노래의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백구가- 致仕한 한 처사가 자연에 돌아가 賞春의 한가한 정을 읊은 노래이다.
죽지사-경치, 인정, 풍속 등을 노래 했으며 일명 乾坤歌라고도 한다.
어부사-벼슬을 버리고 한가하게 강호에 묻혀 사는 선비의 멋을 어
處士): 산골에 살며 글이나 읽고 세속을 멀리하는 사람. 山林學士(산림학사)
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또 두 번이나 상처를 하는 동안에, 아들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자 바로 아래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버렸다. 그런데 그 후에 행상을 하며 이웃 마을에 살고 있던 과부 한씨를 맞아 아들을 얻게 되었
處士歌〉·〈백구사 白鷗詞〉·〈행군악 行軍樂〉(〈길군악〉이라고도 함) 등을 말한다. 이현보(李賢輔)가 개작한 〈어부사〉를 빼고는 작자·연대를 알 수 없어서 악곡의 연원을 파악하기 어렵다.
의 영향을 받아 명칭도 12를 땄고 곡조도 닮은 데가 많은데, 긴 잡가라도 하기도 하고 않아서 부른다 하
處士文人)들 중에서 일시적으로 정치에 참여한 후에 평소 잊지 못하던 자연에 귀의한 귀거래형(歸去來型) 문인과 출사를 포기하고 자연에 은거하여 내면적 성찰을 통해 자기완성을 추구한 은구형(隱求型) 문인들에 의해 읊어졌다.
정극인의 <상춘곡>, 이서의 <악지가>, 송순의 <면앙정가>, 이황의 <환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