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信謙)이 대과(大科)에 오르는 것을 막기까지 하였다 한다. 이윽고 경종(景宗) 2년(1722)에 창집이 정변을 다하여 거제로 귀양가자 울분이 겹치고 신병이 악화되어 64세로 졸하였다 한다. 이장우 해제「燕行錄選集」Ⅳ, 민족문화추진회, 1975
그 역시 형제들과 병칭되는 유명한 문장가였을 뿐 아니라, 화
조선후기의 문신, 소설가.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 서포 김만중은 조선조 예학(禮學)의 대가인 김장생(金長生) 의 증손이요, 충렬공(忠烈公) 익겸(益謙)의 유복자로 1637년 태어났으며,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의 아우로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仁敬
겸(贊謙), 호는 면암(勉庵),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경기도 포천 출생으로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1855년(철종 6) 명경과에 급제, 승무원부정자로 출사한 후 70년(고종 7) 승정원동부승지를 지냈다. 68년 경복궁 재건을 위한 대원군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 시정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73년에 대원
겸(李伯謙)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중인(仲人)의 흉중에는 진초(秦楚)의 위엄이 숨어있다”라고 하였음으로 그의 호를 “진초”라 하였다.
일찍이 큰 포부를 안고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덕량(德量)을 길러 일대종장(一代宗匠:경서에 능하고 글을 잘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 되어 포은(圃隱) 정몽주(鄭
겸(允謙)이며, 어머니는 관비(官婢) 혹은 관기 출신이다. 미인으로 재주가 뛰어났으나, 서녀로써 집안 식구들의 천대를 받았다. 스스로 미천한 신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윤원형에게 접근하여, 그의 첩이 되었다.
문정왕후의 환심을 얻어 궁중에 무상 출입하는 한편, 1551년(명종 6) 정실부인 김씨(金
겸(志謙, 1145~1229)과 원진국사 승형(承逈, 1171~1221)이었다. 최충헌에 이어 최우가 고종 6년(1210)에 권력을 잡았는데, 그는 문인들을 많이 기용하여 자신의 권력기반을 넓히려고 하였고, 아울러 불교계에서도 자신의 지지세력을 더욱 키우려고 하였다. 그래서 최충헌이 자신과 반대되는 불교세력을 과감하
겸(謙)의 아들로 어려서 이퇴계(李退溪)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고 여러 벼슬을 거쳐 당시 동서(東西)의 당쟁에 시작되던 무렵이었으나 중립을 지키기에 힘썼으며, 시(詩)와 문장과 학행의 <삼절(三節)>로 일컬어졌고, 그가 죽은 후 만년에 학도(學徒)들과 경사(經史)를 토론하던 집 동쪽에 학도묘(學
謙, 辭不敢受, 再由濟北公拓跋迪, 齎交璽綬, 公卿等相率勸進, 覺乃受命。
우문각상상표명겸 사불감수 재유제북공탁발적 재교새수 공경등상솔권진 각내수명
鳴謙 : 그가 겸손하다는 명성이 널리 울림
우문각은 아직 표를 올려 겸손함을 알리며 감히 받을수 없다고 사양하니 다시 제북공 탁발적이 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