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대에 이르러 양국이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국교 수립 후 양국은 꾸준히 사신을 교환하며 문화를 교류하였다. 1,500여 년을 이어져 일본 저변에 남아 흐르고 있는 백제의 문화를 자세히 알아보자.
(1) 일본 학문의 시조, 아직기, 왕인박사의 문화 전래
백제가 일본 역사에서 큰
왕 1년) 동진(東晋)을 거쳐 온 서역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다음 해인 385년에는 한산(漢山)에 절을 지었다고 하니 이때 불상을 제작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실제 불교의 발전은 백제가 수도를 웅진(熊津)으로 옮기고 중국 南朝와 정치․문화적으로 가까워지면서 시작된 듯하다.
왕(古爾王, 234-285)때부터로 보인다.
백제가 마한을 전부 정벌하여 고대국가로 등장하는 것은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4)대이다. 근초고왕이 전남 일대까지를 백제 영토로 하는 것은 369년경으로 보인다. 근초고왕 26년(371)겨울에는 왕이 태자와 함께 정병(精兵)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쳐들어가
1. 선정이유
우리 조가 이번 주제를 "의자왕의 재해석"이라 정한 것은 우선 고대 삼국시대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 국가 중에 광활한 대륙의 국가-고구려, 찬란한 문화의 국가-신라에게만 관심이 집중 되어 있어 백제 역사에 관해서는 고구려, 신라 역사보다는 기록도 적을뿐더러 백제 역사에 대해 잘
왕인(王仁)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해 주었고(285년), 4세기 중엽 근초고왕때 아직기(阿直岐)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태자에게 한자를 가르쳤다. 뿐만 아니라 백제는 일본에 도기, 직조, 그림 등의 기술을 전래하였으며, 무령왕이 오경박사 단양이(段陽爾)와 고안무(高安戊)를 파견하고 성왕이 552년에
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號)이자 무칭(巫稱)을 의미한다.
이제 고조선 건국신화인 단군 신화를 알아보자. 단군 신화의 내용을 보면 “옛날 환인의 서자 환웅이 세상에 내려와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하므로, 아버지가 환웅의 뜻을 헤아려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세상에 내려가 사람을 다
왕(太祖王:재위 53∼146) 때부터 강력한 대외발전을 꾀하였다. 태조왕은 현도군을 쳐서 푸순[撫順] 방면으로 축출하였고, 요동군(遼東郡)과 낙랑군(樂浪郡)을 공격하여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으며, 임둔군의 옛 땅에 자립한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복속시켜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왕
왕(234-286년)이전의 기록들이 사료로서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1967년 이후 삼국사기 초기기록들도 신뢰할 수 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고 김원룡, “삼국시대의 개시에 관한 일고찰”, 『동아연구』 7, 1967, pp. 1-33.
, 현재까지도 두 입장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2. 원문 해설
31대 신문왕은 문무왕의 뜻을 기리기 위해 감은사를 동해가에 세웠다.
그 이듬해 5월 해관 파진찬 박숙청이 동쪽 바다에서 조그마한 산이 나타나 감은사를 향해 물결을 따라 왔다갔다 한다는 보고를 받고 신문왕은 일관 김춘질에게 점을 치도록 했다. 일관 김춘질이 말하기를 문무왕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