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곡창의 노랫말을 정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곡조별 분류를 취하여 가집을 엮었다. 이미 보다 다양해진 가창 공간에서는 이전보다 더 많은 노랫말들이 필요했고, 당대의 가창자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작품들을 모아 <청구영언>을 편찬했던 것이다.
가집에는 비록 노랫말만 수록되어 있으
가곡창과 관련하여
19세기로 들어오자 공연에서는 가곡창과 시조창의 대립이 생겨났다. 가곡은 가장 빠른 곡조 삭대엽만 남고 그것이 다시 세분화되었으나 직감적인 흥밋거리를 찾는 추세를 따르지 못해 밀려났다. 가곡에 비해서 격이 낮은 시조창이 더 행세하게 되어 1863년(철종 14)의 「남훈태평가(
가곡창이나 불렀을 기생과 중인 가객 등의 고급가창집단들도 이 잡가들을 가창하게 되고 양반계층까지도 수용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한편, 이런 변모양상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19세기 당시의 잡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배경들을 주목할 수가 있다.
첫째로, 19세기 잡가 담당층
가곡창, 시조창, 사설 시조 등으로 불리워왔다는 점에서 음악적 의의를 지닌다. 또한 사대부들의 세련된 시조에서부터 기녀, 중인, 평민들의 일상적 표현까지 모두 담겨있으며, 이제까지 우리 한국 문학의 여러 특징을 많은 부분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다양한 계층에
‘임금’이라는 하나의 제재에서
다양한 창작의도의 작품들을 창작
그것을 사유하는 층 역시 그 작품들에서
애정시조와 구분되는 창작의도를
파악하고 수용할 수 있었다는 점
연군, 견적, 보효와 18세기 초 중세적 사유방식
서문 - 작품(초중대엽~만횡청류) - 발문의 구성
가곡창의 곡조별로 배열
(특
가곡창과 같은 본류적 정통성을 갖지 않은, 갈래적 승인을 얻지 못한 ‘나머지’ 갈래에 대한 통칭의 의미였다. 이렇게 잡가의 개념 형성은 다른 갈래와의 관계 속에서 시작되었고, 이 때문에 잡가는 그 개념이나 범주가 시대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박애경, 「잡가의 개념과 범주의 문제」, 『한국시가
가곡창을 여러 형태로 변주하고, 시조창과 가사창이 시정에서 새로이 부상했다. 김학성, 「잡가의 사설 특성에 나타난 구비성과 기록성」, 『國文學의 口碑性과 記錄性』, 태학사, 1999, 314-319쪽
18세기 하층의 시정 문화는 떠돌이 예인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농민층의 분화가 진행되는 때에, 농민의
가곡창의 곡조별로 배열하고 편찬하였다. 이러한 배열에서 특정 작품이 특정 곡조로 배속되어 불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청구영언』은 서문과 발문을 청탁하여 싣기도 하고, 작품을 곡조별로 배열하면서 일부분에서는 작가별, 주제별로 배열하여 수록하는 등 사대부들의 문집에 비견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