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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AND 간행물명 : 백제연구612 개 논문이 검색 되었습니다.
5세기 일본 近畿지역 한식계토기 출토 유적과 백제계 이주민들의 성격
愼이슬 ( Shin¸ Iseul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2021] 제73권 1~30페이지(총30페이지)
이주민에 의한 기술과 문화의 전파는 완성품의 수입보다 한 단계 진전된 교류 방식이다. 재지 집단이 외부의 새로운 문물을 수용하는 과정 속에서 변화 양상이 가장 잘 확인되는 자료로서 생활 유적에서 사용된 일상용기인 토기가 있다. 본고는 5세기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사람들이 정착한 곳에서 확인되는 삼국 시대 연질토기인 심발형 토기, 시루, 장란형 토기, 동이와 기형이 유사한 한식계토기를 검토하였다. 특히 5세기 近畿지역 중 오사카(大阪), 나라(奈良)에서 한식계토기가 출토되는 대표적인 유적을 선정하여 한반도계 이주민이 제작하였거나 그들이 가지고 온 연질토기를 모방해 제작된 것을 포함하여 그 특징을 살펴보았다. 5세기 近畿지역에서 확인되는 한식계토기의 전개 양상을 통해 백제계 이주민들의 성격과 정착과정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시기와 지역에 따...
TAG 5세기, 5世紀, 고분 시대 중기, 古墳時代 中期, 백제와 왜, 百濟와 倭, 백제계 이주민, 百濟系 移住民, 한식계토기, 韓式系土器, 5th century, Baekje and Yamato, Kinki Area, Baekje Emigrants, Korean-style Earthenware
문주왕의 웅진천도와 수촌리 고분군 조영세력
姜鍾元 ( Kang¸ Jongwon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2021] 제73권 31~59페이지(총29페이지)
본고는 475년 한성 함락 이후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배경을 수촌리고분군 조영세력을 중심으로 검토한 것이다. 수촌리고분군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중반에 조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 백제는 대내적으로 왕위계승 분쟁과 민심의 분열,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남진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상황이 지속되었다. 백제는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왜를 비롯한 주변국가들과 우호관계를 맺고, 각 지역에 존재하는 유력한 재지세력의 이탈 방지와 인적·물적 지원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 각 지역에서는 위세품을 부장한 고분군이 조영되었는데, 수촌리고분군도 그러한 흐름 속에서 형성되었다. 수촌리고분군 조영세력은 경제적·군사적 기반을 가진 금강 중류지역의 실질적인 지배세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수촌리세력은 웅진천도 이후 신진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는 백씨세력에 비...
TAG 수촌리세력, 水村理勢力, 웅진천도, 熊津遷都, 재지세력, 在地勢力, 위세품, 威勢品, 백가, 苗加, 도人, 道使, Suchonli Influential Forces, Capital Transfer to Woongjin, Local Influence, Luxurious Items, Baekga, name of a person, Head of Duty Officer, position of local office
무령왕릉 묘지(墓誌) 형태 비교 연구
朴淳發 ( Park Soonbarl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2020] 제72권 1~21페이지(총21페이지)
무령왕릉 묘지에 뚫려 있는 천공에 대해 발굴보고서 작성 당시부터 비천(碑穿)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었다. 그 후 식반(式盤) 모방설, 백제 고유 상장문화 기원설 등이 제기되었으나 묘지가 기원한 당시 중국의 상장문화에 대한 맥락적 접근이 부족하였다. 묘지는 묘비와 함께 후장(厚葬)이 보편화되었던 동한(東韓) 무렵에 등장하여 서진(西晉) 이후 정형화된다. 위진(魏晉) 시기의 박장령(薄葬令) 및 금비령(禁碑令)으로 인해 위축된 묘비가 묘실 내부로 축소 이전된 데에 원인이 있다. 선진(先秦)시기의 비(碑)는 땅위에 세운 석재 기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한에 이르러 무덤 조영시 하관(下棺)용 석재 혹은 목재 기둥에 망자의 이력이나 공덕 등을 새긴 묘비의 출현과 더불어 각자비(刻字碑)가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하관시 도르래를 설치한 구멍에서 기원한 비...
TAG 백제, 百濟, 무령왕릉, 武寧王陵, 위진남북조, 魏晉南北朝, 묘지, 墓誌, 묘비, 墓碑, Backje, King Muryeong’s Tomb, South and North Dynasties, Chinese Epitaph, Memorial
무령왕릉 팔찌에 대한 새로운 이해
李漢祥 ( Lee Hansang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2020] 제72권 23~53페이지(총31페이지)
이 글은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팔찌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팔찌 소유자의 성별과 착장방식, 형태와 문양을 검토한 다음 그것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른 자료와 비교하였다. 무령왕릉에는 왕과 왕비가 함께 묻혔는데, 팔찌는 왕비의 유해부에서만 출토되었다. 6쌍의 팔찌 가운데 다리작(多利作) 은팔찌 1쌍은 왼팔, 각목문(刻目文) 금팔찌 1쌍은 오른팔에 착장된 양상이며 팔찌를 세트별로 모아 착장시킨 점이 주목된다. 4쌍의 팔찌는 왕비의 발치 쪽에 놓여 있었다. 신라 왕족묘에서는 이와 같은 착장방식이 확인되지 않는다. 5세기 후반 이후의 신라 고분에서는 남녀 구분 없이 팔찌가 출토된다. 또한 무령왕릉의 사례와 달리 착장 시 좌우의 구분이 없다. 즉, 동일한 형태의 팔찌를 여러 개 만들어 좌우 팔에 나누어 착장시키는 방식이 유행하였다. 중국의 경우는 팔찌가 ...
TAG 백제, 百濟, 무령왕릉, 武寧王陵, 팔찌, , 동진, 東晉, 신라, 新羅, Baekje, Royal Tomb of King Muryeong, Bracelet, Eastern Jin, Silla
백제 무령왕릉 출토 동경(銅鏡) 재검토
韓茗 ( Hang Ming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2020] 제72권 55~94페이지(총40페이지)
본고에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동경 세 점을 재검토하였다. 중국에서 출토된 육조·수당(隋唐)시대의 동경과 저술에 수록된 동경의 자료를 비교해 보면, 무령왕릉의 동경은 양식론적 시각에서 한나라 이후 제작되었다. 또 육조시대에는 답반제경(踏返製鏡) 기술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부조인물방격규구경(浮雕人物方格規矩鏡)은 답반제경 기술을 적용하여 경범(鏡范)을 만든 후 문양을 조각하여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고경(古鏡)에 직접 다시 주조하여 부조를 형성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출토유물의 보존 상태와 공반유물의 시대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무령왕릉 동경의 연대는 다른 부장품들과 매장시기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세 점의 동경의 형식과 출토 위치를 검토해본 결과, 부장된 규구경(規矩鏡)과 수대경(獸帶鏡)의 문화적 성격을 토론할 수 있었고, 왕비의 발 부근에서 ...
TAG 동경, 銅鏡, 육조, 六朝, 복고경, 復古鏡, 우주관, 宇宙觀, 무령왕릉, 武寧王陵, Bronze Mirror, Retro-mirrors of Six Dynasties, Han-Dynasty Mirror, Universe View, King Muryeong
백제연구소 40년의 연구성과와 과제
姜鍾元 ( Kang Jongwon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2020] 제71권 1~21페이지(총21페이지)
이 글은 백제연구소가 법정 연구소가 된지 40주년을 맞아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정리 하고, 향후 연구소의 효율적인 운영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백제연구소는 백제사 연구를 목적으로 출발하여 학제간 연구를 통해 연구 분야를 다양화시키고, 동아시아로 연구범위를 확대시켜 국제적 인 학문교류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구논문집인 『百濟硏究』70집을 비롯해 백제연구총서 13권, 학술연구총서 14권, 기타 4권 등을 발간하였다. 그리고 학술활동으로 66회의 공개강좌, 11회의 국내 학술회의, 22회의 국제학술회의, 23회의 자료윤독회, 기타 6회의 초청강연회와 학술회의 등을 개 최하였다. 이를 통해 백제연구소는 백제사 연구자들에게 다양한 연구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백제사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각종 학술회의를 통해 연구자들의 연구역량 제고와...
TAG 백제연구소, 百濟硏究所, 백제연구, 百濟硏究, 공개강좌, 公開講座, 국제교류, 國際交流, 연구과제, 硏究課題, Baekje Research Institute, Baekje Research, Open Lectures, International Exchanges, Research Project
7세기 일본 내라현(奈良縣) 사쿠라이(櫻井)지역의 이른바 전곽식석실(磚槨式石室) 검토
金奎運 ( Kim Gyuun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2020] 제71권 23~55페이지(총33페이지)
고대 일본열도를 상징하는 전방후원분은 7세기를 전후하는 시기에 당시 중심지역인 畿內지역부터 소멸하기 시작한다. 이후 횡구식석곽 등의 새로운 묘제가 주요 매장주체부로서 자리를 잡게 되는 한편, 奈良縣 櫻井지역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보이지 않는 석재를 전돌과 같이 가공하여 구축하는 이른바 磚槨式石室이라고 하는 독특한 매장주체부가 축조된다. 이 전곽식석실에 대해 속성분류 등의 형식학적 분석을 통해, ⅠA, ⅠB, Ⅱ, Ⅲ, Ⅳ유형으로 설정하고 그 특징을 명확하게 하였다. 더욱이 각각의 유형의 연대에 대해 형식학적 변화와 출토토기 분석을 통해 7세기 전엽부터 7세기 중엽에 걸쳐 축조되는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전곽식석실의 기원과 피장자 문제에 대해서도 검토하였다. 결론적으로 전곽식석실과의 비교 대상이 되는 백제의 전실분과 송산리형석실과는 시기적으로 전혀 겹치지 않는다...
TAG 사쿠라이지역, 櫻井地域, 전곽식석실, 磚槨式石室, 7세기, 7世紀, 백제, 百濟, 이주민, 移住民, Sakurai Area, Brick-type Stone Chamber, 7th Century, Baekje, Migrants
왜왕권의 백제유민 관리와 인재등용책
延敏洙 ( Yeon Minsoo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2020] 제71권 57~79페이지(총23페이지)
왜왕권의 백제유민에 대한 관리와 등용은 일본고대의 신국가의 건설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이들 이 보유한 신지식, 신기술은 그대로 왜왕권의 국가운용에 이입되었고, 그 저변으로 확산되어 갔다. 수천명에 달하는 백제의 망명자 속에는 중앙과 지방에서 상층부를 구성하는 귀족과 호족층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군사, 학문, 의술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적지 않았다. 왜왕권은 백제부흥을 위해 수군단을 구성하고 막대한 군수물자를 투입하는 등 국가적 재정을 소모했지만, 결과적으로 백제의 수많은 인재 들을 받아들이는데 성공하였다. 백제 유민들은 왜왕권의 신국가정책 속에서 재능과 신분에 따라 관인으로 발탁, 등용되어 각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해 나갔다. 그들 중에는 학문과, 의술, 문예 등의 제방면 에서 세습적 지위를 통해 가문의 번영을 이룬 씨족도 적지 않았다.
TAG 왜왕권, 倭王權, 백제유민, 百濟遺民, 백강전투, 白江戰鬪, 백제군, 百濟郡, 귀실집사, 鬼室集斯, 사택소명, 斯宅紹明, Japanese Royal Authority, Migrants of Baekje, Baekje Battle, Baekje Forces, Guisiljipsa
중국에서의 백제연구
馮立君 ( Feng Lijun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2020] 제71권 81~150페이지(총70페이지)
한당시대 백제의 역사에서 동아시아를 발견할 수 있다. 백제를 국호로 삼은 인간 공동체와 그 문명 은 이웃 세계와의 다원적이고 밀접한 관계 속에서 활약했으며, 이는 백제가 주변부가 아닌 한당동아시아의 중추로서의 역사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백제의 역사는 첫째, 중국과 일본, 신라-고구려 계통이 기록한 ‘타자’의 역사적 기록, 다른 하나는 고고자료와 금석문 등을 포함하는 ‘自我作古’의 의 미를 갖는 백제인들의 역사유적이다. 이러한 자료들은 동아시아 각지 산포되어 있으며 오늘날 전면적으로 해독되고 있어 백제와 동아시아 연구를 심화시키는 본질적인 방법이 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기점으로 하면 한당시대 백제연구의 학술연구사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945년 이전 중국학자들의 연구는 초기단계였고, 일본학자들의 발굴조사와 연구가 주가 되었으며...
TAG 백제, 百濟, 한당시대, 漢唐時代, 동아시아, 東亞細亞, 중국, 中國, 연구사, 硏究史, Baekje, Han-Tang Period, East Asia, China, Research History
19세기 후반 한국과 서양고고학
( Luke Edgington-brown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백제연구 [2019] 제70권 1~50페이지(총50페이지)
이 논문은 19세기 말 한국에서 활동한 초기 서양학자들이 남긴 고고학적 연구와 수집품을 탐구하고 재구성한다. 중국에서 아편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이 일어났을 때에도 쇄국정책을 유지했던 한국은 서양에서는 기회의 땅으로 여겨졌다. 1868년 오페르트 사건은 서양학자들이 한국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1880년대 한국이 서양에 문호개방을 하면서 소수의 서양학자들이 한국의 고대사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 당시 한국에서 활동하던 대표적인 서양학자로는 피에르 조이(Pierre Jouy), 윌리엄 애스턴(William Aston), 윌리엄 고우랜드(William Gowland)가 있다. 이들이 당시 수집했던 유물들은 현재 영국과 미국에 소장되어 있다. 그들의 초기 연구는 19세기 말 현대고고학의 발전과 평행하고 있다. 한국을 연...
TAG 19세기 후반 한국, 19世紀 後半 韓國, 고고학사, 考古學史, 호고주의, 好古主義, 오페르트, Opert, 애스턴, Aston, 고우랜드, Gowland, 조이, Jouy, 토기생산, 土器生産, Late 19th Century Korea, History of Archaeology, Antiquarianism, Oppert, Ceramic P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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