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근식 ( Gun Sik Seo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2014] 제47권 171~199페이지(총29페이지)
화담의 선천역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의 선천역학은 리기론보다 적은 연구 성과가 있다. 화담의 선천역학에 관한 부분은 소옹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화담사상의 또 하나의 특징은 노장사상이나 불교사상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라는 점이다. 노장사상이나 불교사상에 대해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데, 부정적인 측면은 철저하게 비판하고 긍정적인 면만을 인용하였다. 화담은 천도로서의 복괘(復卦)를 강조한다. 복괘가 천도와 관련된다는 점을 ㄴ동지음(冬至吟)」과 ㄴ복기견천지지심설(復其見天地之心說)」을 통해 살펴보았다. 복괘의 일음일양 혹은 일동일정하는 것은 천지지심과 관련된다. 복괘의 천지지심은 ‘생(生)’과 관련된다. 화담은 인도로서의 도리에 대해 간괘(艮卦)의 그침[止]을 강조한다. 이 그침[止]의 도리라는 것은 시중(時中)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시...
김용흠 ( Yong Heum Kim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2014] 제47권 201~254페이지(총54페이지)
송시열과 윤선거, 윤증 부자의 갈등에서 시작된 회니시비(懷尼是非)는 병자호란 당시와 이후 윤선거의 처신을 문제 삼아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는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이 정치적 갈등의 원천으로 작용한 대표적인 경우였다.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공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윤선거가 윤휴를 옹호한 것은 그의 북벌론을 수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이후 탕평론으로 발전하였다. 숙종대 본격화된 회니시비는 소론 탕평론과 노론 반탕평론이 갈등하는 한 형태였다. 탕평론은 조선왕조 국가가 처한 대내외적 위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정책과 제도를 모색하고 이를 정치의 중심 문제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의 소산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당시의 지배층이었던 양반과 지주의 특권을 약화 내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노론 반탕평론은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기득권을 방어하...
이상형과 이문재 부자는 당대 서인계 산림의 영수라 할 수 있는 김장생과 그의 아들 김집을 사사하여 사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이에서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서인계 학통을 계승했다. 따라서 이상형·이문재 부자의 학문·사상과 자연인식을 살펴보는 것은 조선후기 서인-노론계의 자연학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이상형의 가문은 전라도 남원을 지역적 기반으로 삼아 경제적 부를 축적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이상형과 이문재는 출사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남원에 거주했다. 따라서 이상형·이문재 부자와 같이 남원이라는 향촌사회에서 삶을 영위했던 유학자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 자연학과 관련된 지식에 접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지식들이 향촌사회 단위에서 어떻게 유통되었는지를 살펴보는 일은 당시 조선사회의 사상·문화계의 지형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을 줄...
조현범 ( Hyeong Beom Cho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2014] 제47권 307~349페이지(총43페이지)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받아들였던 연옥 관념과 이에 입각한 연옥 관련 의례 실천들을 다루었다. 새로운 종교적 관념과 실천이 도입되었을 때 발생하는 전형적인 반응이 배타적 거부와 전면적 수용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존재한다는 점에 입각하여 조선 후기에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제사 문제로 전통적인 세계관을 따르는 주류 사회와 충돌을 빚은 이후에 사후 세계의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대안을 형성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특별히 연옥이라는 독특한 교리와 그 의례적 실천들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먼저 연옥에 대한 관념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당시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천주교 교리서에 근거하여 개괄하였다. 그런 다음에 연옥 관념을 실천하는 의례적 장치로서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를 탐구하였다. 전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천주교 의례의 일반 구조를 따...
최정준 ( Jeong Jun Choi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2014] 제47권 351~379페이지(총29페이지)
강화도조약(1876) 체결 이후 조선은 국기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그 후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체결 때 조선국기가 처음 등장하였다. 최초의 국기는 ‘조선의 깃발’이었다. 이것은 이응준이 제안한 것으로 조미수호조약 때 사용되었지만 국가의 공인을 받지 못했다. 이 즈음 청의 마건충(馬建忠)은 ‘조선의 국기가 일본 국기와 혼동된다’며 태극에 8괘를 그려 국기를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고종은 박영효에게 국기제작을 지시하였다. 1882년 박영효는 일본으로 가는 배안에서 태극기의 모델을 제작하여 임금에게 보냈다. 이 국기는 가운데 태극문양의 원과 8괘에서 뽑은 4괘로 구성되었다. 박영효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국의 국기를 보아온 영국인 선장 제임스의 조언에 따라 4괘를 국기의 네 모서리에 배치시켰다. 박영효는 제작한 태극기를 일본에서 게양하였다...
박종린 ( Jong Rin Park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2014] 제47권 381~412페이지(총32페이지)
대중시보사 그룹’은 ‘맑스주의 크루조크’의 구성원들이 맑스주의의 연구와 출판 상황이 식민지 조선보다 유리한 일본으로 이동하여 재일조선인 사회운동가들과 결합하여 조직한 모임이다. 이 모임은 비합법적인 공산주의 그룹이 아니라 대중시보사를 조직하고 『대중시보』를 제3호까지 발행했던 ‘동인(同人)’ 5명으로 구성되었다. 동인 가운데 김약수.정태신.변희용은 사회주의자였고, 원종린.황석우는 아나키스트였다. 이들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반자본주의’라는 기치 때문이었다. ‘대중시보사 그룹’은 1921년 가을 무렵 김약수와 정태신이 ‘맑스주의 크루조크’를 ‘재일본조선인공산단체’로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 구성원들은 해체 후에도 각각의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지향하는 바가 동일한 경우는 공동 행동을 전개하였다. 『대중시보』에 실린 글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대중시보사 그룹’은 ‘맑스주의 크루조크’의 구성원들이 맑스주의의 연구와 출판 상황이 식민지 조선보다 유리한 일본으로 이동하여 재일조선인 사회운동가들과 결합하여 조직한 모임이다. 이 모임은 비합법적인 공산주의 그룹이 아니라 대중시보사를 조직하고 『대중시보』를 제3호까지 발행했던 ‘동인(同人)’ 5명으로 구성되었다. 동인 가운데 김약수.정태신.변희용은 사회주의자였고, 원종린.황석우는 아나키스트였다. 이들이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반자본주의’라는 기치 때문이었다. ‘대중시보사 그룹’은 1921년 가을 무렵 김약수와 정태신이 ‘맑스주의 크루조크’를 ‘재일본조선인공산단체’로 재조직하는 과정에서 해체되었다. 그러나 그 구성원들은 해체 후에도 각각의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지향하는 바가 동일한 경우는 공동 행동을 전개하였다. 『대중시보』에 실린 글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이자랑 ( Ja Rang Lee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2014] 제46권 1~28페이지(총28페이지)
불교적 입장에서 원광(圓光) 세속오계(世俗五戒)의 사상적 배경을 논할 경우, 특히 살생유택(殺生有擇)은 불살생 계율과의 상치로 인해 해석이 쉽지 않다. 불살생은 불교 계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그야말로 거의 절대적인 원칙이다. 하지만 살생유택은 ‘살생을 하되 가려서 하라’라고 하여 부분적으로 살생을 용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살생계와 정면으로 부딪히게 된다. 양자 간에 발생하게 되는 모순은 기존의 연구에서 ‘정법호지라는 대의적 차원에서라면 불교에서도 살생을 용인한다’는 논리 하에 설명되었다. 이는 당시 신라가 놓여 있던 정치적 상황 및 원광이 보여준 일부 행적을 염두에 둔 해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할 경우, 원광은 전쟁에서의 살생을 합리화시켜주는 이론으로 살생유택을 제공한 것이 된다. 이는 승려로서의 원광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훼...
석길암 ( Gil Am Seok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2014] 제46권 29~55페이지(총27페이지)
오대산 문수신앙이 자장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월정사의 창건 역시 자장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에는 남아있는 기록들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과 같은 월정사 대가람을 중심으로 하는 오대산 불교권의 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기록상으로는 월정사가 처음부터 대가람의 면모를 갖추었을 가능성을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면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서 월정사 대가람을 중심으로 하는 오대산 불교권의 재형성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본 논문은 그 과정과 배경을 검토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월정사의 터가 처음 정해진 것 곧 창건은 자장과 깊은 관계가 있으며, 훗날 신효(信孝) 거사가 여기에서 오류성중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곧 사찰로서의 출발은 자장부터이지만 가람의 본격적인 전개는 범일(梵日)의 제자인 신의두타(信義頭陀)가 와서 암자를 세운 것에서 ...
황인규 ( In Gyu Hwang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2014] 제46권 57~82페이지(총26페이지)
본고는 고려후기 조선초 강진 백련사의 역사와 사세에 대하여 고승을 중심으로 살펴본 연구이다. 『만덕사지』 등의 관련 문헌 및 사료가 있지만 여말선초의 강진 백련사를 제대로 설명해줄 만한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현재 여말선초 백련사에 관해서는 ‘고려 말에는 강진지방이 세 차례의 왜구침입을 받았을 때 이 사찰도 함께 폐허화되었다’라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강진의 백련사는 요세와 그의 제자 천인과 천책, 정오 때까지 그 부속암자 만덕산 용혈암과 괘탑암을 중심으로 사세를 진작시켰다. 강진 백련사의 결사운동은 강진 백련사 일대 뿐만 아니라 분원인 완도의 법화사, 상주의 동백련사, 제주의 묘련사 등으로 확대되었다. 하지만 강진 백련사 고승이 개경의 묘련사에 진출하게 되면서 결사정신이 점차퇴조되었으며, 강진 백련사의 사세도 이전 보다 축소되어 갔다. 특히 왜구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