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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576 개 논문이 검색 되었습니다.
신라 통일기 계금당(罽衿幢)ㆍ이계당(二罽幢)의 설치와 확대
韓準洙 ( Han Jun-su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7권 83~109페이지(총27페이지)
신라는 삼국통일전쟁을 거치며 군사조직의 편성과 운영에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 『삼국사기』 직관지 무관조에 기록된 23개 군단(이하 23군호)은 그러한 과정을 잘 담고 있다. 현재 23군호에 대한 고찰은 일정 부분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미완상 태로 존재하는 것이 많다. 자료가 소략한 때문이지만 적극적인 접근이 필요한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계금당·이계당은 그러한 군사조직의 하나로서 고찰이 필요한데, 설치가 태종무 열왕 원년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金春秋가 왕위에 오른 후 시행한 첫 군사정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작지 않다. 신라중대의 개창과 더불어 창설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정치적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실권자로 정국을 이끌었던 김춘추는 진덕여왕 사후 즉위한 뒤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강력히 추진했다. 계금당이 그것으로 신...
TAG 계금당, 이계당, 총관, 행군, 기동군단, Gyegeumdang, 계금당, Igyedang, 이계당, Chonggwan, 총관, Haenggun, 행군, mobile troops, 기동군단
고려전기 의천찬(義天撰) 『원종문류(圓宗文類)』 소수(所收) 불교 문헌의 현황과 전승
朴鎔辰 ( Park Yong-jin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7권 111~145페이지(총35페이지)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이 편찬한 『圓宗文類』는 현재 일본의 龍谷大圖書館에 『원종문류』 권1의 간본, 권14와 권22의 필사본, 京都大에 권14와 권22의 필사본이 전존하며, 金澤文庫에는 권20의 사본 일부가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안동 보광사 佛腹藏의 『圓宗文類』 제22권 丁遜의 「法界觀門鈔序」 1張이 전한다. 이외에 일본의 『일본불교전서』에는 『원종문류』의 인용이 산견된다. 『원종문류』에 수록된 장소는 현전 간·사본에 수록된 것과 현전하지 않지만 인용을 통하여 장소명을 알 수 있는 것으로 구분하여 분석하였다. 『원종문류』 권1은 내제 「諸部發題類」로 장소의 서문류는 모두 22건이며, 「華嚴經」, 「圓覺經」, 「般若 經」, 「楞嚴經」 등의 장소이다. 『원종문류』 권14 「諸文行位類」에서는 지엄과 법장이 찬술한 『탐현기』, 『오교장』, 『수현기』, 『...
TAG 고려불교, 의천, 원종문류, 신편제종교장총록, 장소, 불교교류, Buddhism of Goryeo, 高麗佛敎, Wonjong-Munryu, 圓宗文類, Uichon, 義天, Buddhism commentaries, 章疏, Buddhism exchange of East Asia, 佛敎交流
고려 숙종ㆍ예종대 여진정벌과 별무반의 전술체계
金洛珍 ( Kim Nak-jin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7권 147~181페이지(총35페이지)
고려는 국초부터 여진에 대해 번인으로서 인식하며 기미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여진인들의 대부분은 고려의 서계와 동계 주변에 흩어져 살면서 고려에 내조 하여 물자를 얻어가면서 생활하였다. 때로는 고려의 국경을 침범하여 일찍부터 이 들에 대한 방비태세를 갖췄다. 동여진에 대한 대책은 기본적으로 동계 방면에 성 보를 축조하여 이들의 침구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이 군사기지에 주진군이 배치되어 군사적 대비를 하였다. 또한 궁노 등 다양한 무기들을 변경에 배치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거란 침략이후 커다란 침략을 겪지 않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군사적 역량이 약화되어 갔다. 숙종대 문제가 된 동여진은 문종 때 변경을 침범하여 두 차례에 걸친 정벌을 감행하였다. 동계가 안정된 이후 문제가 된 숙종 9년 이전에 는 커다란 침구는 없었다. 여진의 오아속이 여진부족을 통합하고 함경...
TAG 동여진, 東女眞, 윤관, 尹瓘, 기병, 騎兵, 보병, 步兵, 별무반, 別武班, , , , , 정주관, 定州關, Jurchen, 女眞, Byeolmuban, 別武班, Yun Gwan, 尹瓘, Cavalry, 騎兵, Catapult, 쇠뇌, Bow,
한양도성(漢陽都城)의 개축과 지방 동원 체계의 변화
申泳文 ( Shin Young-moon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7권 183~212페이지(총30페이지)
조선 태조대 축성되어 세종대 개축된 한양도성은 축성시기별 역역 동원방식이 달랐다. 초축시기인 태조대에는 단위축성 구간이 고르게 배분되었고 세종대에는 인구의 다소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태조대에는 중앙의 관료조직에 의해 감독된 반면 세종대에는 지방관의 책임에 의한 축성이 이루어졌다. 한양도성 각자성석에 따르면 태조대에는 600척씩 규격화된 구간에 축성관련 관료들이 조직화되어 기재 되어 있다. 세종대에는 축성구간이 일정하지 않고 축성에 동원된 군현의 명칭만을 새겨 놓았다. 낙산일대의 각자성석에는 ‘군현명+造排始’라는 각자의 조합 형태를 띠는 구간이 존재한다. 이 구간은 홍주의 翼軍과 청주의 翼軍 일부로 이루어져 있다. 세종대 역역징발은 군사적 성격이 가능한 軍翼道體制의 편제에 따라 이루어졌다고 판단된다. 이를 통해 볼 때 조선 초기의 지방제도와 이에 따른 역역체...
TAG 한양도성, 각자성석, 조배시, 造排始, 군익도체제, 軍翼道體制, Hanyangdoseong, Seoul City Wall, Inscribed Stones, Jobaesi, Gunikdocheje
조선후기 서울의 호구 변동과 인구기록의 특성 - 한성부 호구 자료를 중심으로 -
權奇重 ( Kwon Ki-jung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7권 213~239페이지(총27페이지)
본 논문은 조선시대 서울 지역에 남아있는 호구 자료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서울 지역의 호구 변동과 인구 기록의 특성을 살펴본 것이다. 2장에서는 호구 기록의 시기별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먼저 시기별 호당 구수의 변화를 살펴보면, 19세기 전반까지 호당 구수가 지방에 비해 훨씬 많았다 는 사실이다. 이는 직계 가족의 수가 매우 적게 기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평균 노 비수가 지방보다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와 함께, 17세기 후반에서 대부분의 호 가 노비를 소유한 반면,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1명의 노비도 소유하지 못한 호 가 다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같이 19세기 중반 이후의 개별호의 노비 소유 양상은 대구부와 비교해봤을 때,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서울의 경우 19세기 중반 이후 노비를 소유한 호가 소수에 불과하지만, 대구부의 경우,...
TAG 호구 변동, 서울 호적, 호구 단자, 노비, 인구, census change, family register in Seoul, census terminal, servant, population
1880년대 부산해관(釜山海關)·감리서(監理署)의 개항장 업무 관할 체계
閔會修 ( Min Hoi-soo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7권 241~271페이지(총31페이지)
1885년에 조선 海關의 總稅務司로 부임한 메릴(H. F. Merrill; 墨賢理, 1853~ 1935)은 조선 해관의 淸國 예속을 위해 그 행정명령체계를 청국해관처럼 監理(조선측 해관 감독)-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과 세무사(외국인)-총세무사의 이원구조로 개편하려 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총세무사가 세무사를 장악하게 하고 감리의 간섭을 배제시키는 대신 반대급부로 관세수입 관할권을 감리가 갖도록 조선에 제안 했다. 이러한 감리-해관 관계의 구조 개편 결과 개항장 監理署가 직제상 독립관서화되고 감리서-해관의 이원적 행정명령체제가 성립되었으며, 이 체제는 감리서· 해관과 관련된 여러 규정들의 제정과 더불어 정착되어 갔다. 한편 釜山港의 지리 적 특수성으로 인해 監理分署가 설치되었고, 감리를 보좌하는 幇辦 관련 규정이 제정되면서 방판이 감리분서에 상주...
TAG 監理, 幇辦, 海關, 稅務司, 釜山, 關稅, 免稅, Gamri, the Superintendent, Bangpan, Vice Superintendent, Maritime Customs, the Commissioner of the Customs, Busan, tariff, tariff exemption
안중근과 빌렘
張錫興 ( Chang Seok-heung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7권 273~292페이지(총20페이지)
안중근에게 빌렘은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절대적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안 중근은 1897년 빌렘에 의해 가톨릭 영세를 받고, 복사(服事)로서 빌렘 신부와의 인연을 맺어 나갔다. 그리고 안중근이 1910년 순국할 때 종부성사와 최후의 미사를 통해 두 사람의 인연은 영생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자유와 평화’는 인류가 이뤄내야 할 꿈이자 희망이다. 오늘날 우리가 추구해 야 할 세계 평화는 제국주의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자유와 평화를 위한 민족운동이자 인류평화운동이었다. 50여 년의 독립 운동에서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한국인은 5백만 명에 달하고, 그 가운데 희생 된 사람만도 수십만명에 이르렀다. 한국 독립운동에서 안중근을 비롯한 그의 집안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3대에 걸쳐 20여 명이 독립운동을 ...
TAG 안중근, 빌렘, 동양평화론, 가톨릭, 안태훈, 뮈텔, 하얼빈 의거, 종부성사, Ahn Jung-geun, J, Wilhelem, Theory of Oriental Peace, Catholic, Ahn Tae-hoon, Muttel, Ahn Jung Keun, s patriotic action in Harbin, Last rites
1920~30년대 북경지역 한인들의 사회주의 혁명운동
孫艶紅 ( Yanhong-sun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7권 293~329페이지(총37페이지)
1920년 초부터 상해파 고려공산당세력과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세력이 북경 에 조직을 두어 주도권을 둘러싸고 경쟁적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상해 대한 민국 임시정부의 구성 및 노선에 불만을 가진 박용만, 신채호를 비롯한 무장투쟁 론자들은 북경에 집결하여 연해주,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통합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할 계획을 추진해 나갔다. 그리고 계획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동휘 고려공산당 세력 및 문창범 대한국민의회의 사회주의세력과 연대관계를 맺었다. 1922~1923년 사이에 장건상 등 공산주의 혁명가들은 북경의 한인 유학생들과 같이 혁명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들은 공산주의사상을 연구하면서 창일당을 조직 하고 비밀결사인 혁명사를 결성하고 ≪혁명≫을 간행하여 공산주의적 혁명사상과 방략을 선전했다. 1925~1926년 사이에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한인 공산주...
TAG 북경, 한인 공산주의자, 혁명운동 중국 공산당, Beijing, Socialist revolution movements, Chinese Communist Party
해방 직후 일본군의 한반도 점령 실태와 귀환
曺健 ( Cho Gun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7권 331~362페이지(총32페이지)
일본군은 개항 이래 한반도를 무단으로 침략하였고 1910년 한국병탄 이후에는 제국의 식민 지배를 무력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제국주의 일본에게 군대는 제국의 확립은 물론 이를 유지하고 팽창시킨 존재였던 것이다. 물론 이 때문에 군의 일방 적 독주와 지나친 월권은 제국 전체를 패멸로 이끈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주목할 점은 일본군의 한반도 내 군사적 행위가 비단 해방 이전에 국한하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은 언론과 여론을 통제하고 한인들의 독립 시위를 직접 탄압하는 한편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실질 적인 치안 유지를 담당하였다. 한인들에 의해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치안대 등 이 나름의 활동을 전개했지만 그 역할은 제한적이었다고 판단된다. 특히 일본군은 헌병 병력을 단기간에 6배 이상으로 증원하...
TAG 일본군, 조선 주둔 일본군, 치안권, 헌병, 귀환, 해방, Japanese army, Japanese army stationed in Korea, security authority, military police, returning, Liberation of Korea
조선족 해원 일기를 통해서 본 북한의 항일빨치산 투쟁사 활용과 문혁기의 ‘석동수 특무 조직사건’
廉仁鎬 ( Yeom Inho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7권 363~402페이지(총40페이지)
북한은 체제 정당성을 확보하고 경제건설에 인민을 동원하기 위해서 재만 조선 인 항일빨치산 투쟁사를 대대적으로 정리, 선전해왔다. 그것은 중국의 조선족 인민들에도 영향을 주었다. 영향을 받은 일부 조선족 인민들이 김일성을 숭배하고 북한을 조국으로 간주하였으며 중국에서 어려운 일이 닥치기만 하면 북한으로 불법 이주하였다. 한편 북한은 만주의 항일 역사 자료의 수집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일부의 연변 조선족 간부나 문화인들이 북한의 자료 수집에 협조를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석동수는 항일빨치산투쟁 유물을 북한에 제공하거나 북한 조사단의 중국 현지답사를 지원하였다. 나아가서는 북한으로 탈출해서 조선혁명박물관 관장 직을 맡았다. 평양에 들렀다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조선족 변사 해원은 자신도 항일 역사 자료를 수집해 북한으로 가고자 결심을 하였다. 중국...
TAG 조선족, 조선혁명박물관, 연변문화대혁명, 석동수, 임민호, 주덕해, Chinese Korean, Chosun Revolution Museum, the Cultural Revolution in Yanbian, 延邊, Suk Dongsu, 石東洙, Im Minho, 林 民鎬, Ju Dukhae, 朱德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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