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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기관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576 개 논문이 검색 되었습니다.
『수서(隋書)』 「백제전(百濟傳)」에 보이는 무왕(武王)의 이중외교(二重外交)와 제(濟)ㆍ여관계(麗關係)
宣奉助 ( Seon Bongjo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8] 제49권 69~108페이지(총40페이지)
백제와 고구려의 동맹 결성 시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643년을 그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7세기 『隋書』 「백제전」에 보이는 ‘實持 兩端’ 기사에 착안하여 그 시점을 607~611년 무렵으로 올려 보고 있다. 『수서』 「백제전」에서는 607년 백제 무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 토벌을 요청했고, 611년 에는 軍期를 묻기도 했으나 정작 隋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면서 『隋書』는 백제가 애초부터 고구려와 통화한 채, 隋를 엿본 것이라고 했다. 『수서』가 濟ㆍ麗의 통화시점을 607년으로 인식한 것은 같은 해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그렇지만 기존의 대체적인 시각처럼 그것을 부정하거나 중대한 오류로 치부하기는 어렵다. 607년 이후 백 제가 실제로 대고구려...
TAG 실지양단, 양단책, 이중외교, 제ㆍ려통화, 고구려ㆍ수 전쟁, Dual Diplomacy, Alliance, relations between Baekje and Koguryo, War between Koguryo and Sui dynasty
향도(香徒)를 통해서 본 신라 중(中)·하대(下代) 지방사회의 변동
韓準洙 ( Han Jun-su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8] 제49권 109~138페이지(총30페이지)
향도는 신라와 고려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고대와 중세의 연결고리로서 의미를 지닌다. 신라의 향도는 진평왕대 김유신의 용화향도가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나타나는데, 당시 삼국 간 항쟁 격화로 군사 적 긴장이 고조되던 가운데 국가공동체를 배경으로 성립된 향도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 사회가 점차 보수화되고 골품질서가 심화되는 가운데 경제적 빈곤이 당면한 과제로 떠올랐다. 국가의 구휼은 한계가 있었기에 기층민은 승려, 촌주 등 지방사회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자활을 모색하였다. 그러한 과정에 향도가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향도에 기반한 지역공동체는 보다 적극적인 노력에 나섰다. 연기 지역의 향도 는 전란 이후 기층민을 토대로 지역공동체 향도의 등장이라 할 수 있고, 강원도 고성에서 승려 발징이 결성한 향도는 군현을 단위로 한 대 규모 지역공동체의...
TAG 향도, 지역공동체, 지방사회, 지방세력, 화랑도, hyang-do, local community, local society, local forces, Hwarang-do
나제동맹기 백제-신라의 문화교류
洪潽植 ( Hong Bosik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8] 제49권 139~170페이지(총32페이지)
5세기 전반부터 6세기 중엽까지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고, 고토수복을 위해,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팽창을 위해 백제와 신라는 화친과 동맹을 되풀이하면서 관계를 유지하여 왔는데, 이를 소위 나제동맹이라 한다. 나제동맹이 유지된 이 1세기 반가량의 기간 사이에 백제와 신라는 다양한 부면에서 교류관계를 유지하였고, 그러한 흔적의 물질자료들이 백제와 신라 양 지역에서 확인되었다. 이 양 지역에서 확인된 교류의 산물이 나제동맹의 결과물 로만 단정할 수 없지만,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의 시기에 집중해서 양 지역 중앙 지배층의 신분을 표상하는 위세품에서 제작기술과 디자인이 유사하고, 신라 왕성인 월성해자와 손곡동 및 육통리 등의 신라 초기 기와 생산유적에서 백제 造瓦術과 디자인이 반영된 점은 백제와 신라 최고 지배층간에 밀접한 관계 가 유...
TAG 백제, 신라, 나제동맹, 결혼동맹, 위세품, 기와, Baekje, Silla, Silla-Baekje Alliance, Marriage Alliance, prestige goods, roof tiles
임진왜란기 경상좌도 지역 청도군수의 임용실태와 전쟁대응
李仙喜 ( Yi Sunhui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8] 제49권 171~198페이지(총28페이지)
이 논문은 임진왜란기 수령의 활동상황을 추적하고자 청도군수의 재임상황 과 전쟁업무를 살핀 것이다. 전란 초기 수령이 임지에 있었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만큼 전란기 수령의 부재와 도망은 이 시기를 특징짓는 부정적 이미지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최근 연구를 통한 임란기 수령과 관군에 대한 새로운 접근은 수령의 활동을 구체적으로 살필 필요와 호응하고 있다. 이에 청도군수가 국가 전란 시기 어떤 기준으로 선발되었으며, 어떤 역할을 담당하였는지를 살폈다. 관료제로 운영되고 행정체계가 작동하였던 조선시대에 7년간 겪은 전란의 혼란기에 정부의 통치력은 어느 정도 작동하였는지를 고찰 할 수 있는 일단이 되고자 하였다. 한편 도망으로 분류된 수령 중에는 전란 중 비록 순찰사나 조방장의 진에 합류하여 임지를 이탈한 경우나 전투 중 사망으로 연락이 두절된 경우도 포함되어 있었다...
TAG 수령, 관료제, 임진왜란, 청도, 무신, 배응경, 오례산성, 화왕산성, local governor, bureaucracy, Japanese invasion of Korea, Cheongdo, a military official, Bea Yeung-Keang, O-Rea mountain fortress, Huea-Yang mountain fortress
금남 최부의 정치 활동과 인재관 -성종 17년 중시(重試) 책문과 최부의 대책문을 중심으로-
安沼妍 ( Ahn So Yeon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8] 제49권 199~227페이지(총29페이지)
최부는 성종대에 활약한 사림이다. 여말선초 길재의 문인으로 건국 초에 은 거한 주자성리학자 집안에서 성장하였으며,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문인으로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의 편찬에 참여하면서 성종대 문물제도 정 비에 기여하였다. 또한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학풍을 영호남 지역에 전파하여, 영호남 사림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최부는 성종대에 두 차례 과거 시험을 치렀는데 그 중 성종 17년 重試의 경우 그 책문을 성종이 직접 지었고 내용 또한 인재 등용에 대한 것이었으며, 최부가 이 시험에 亞元으로 합격한 대책문이 전하고 있다. 따라서 성종 17년 책문과 대책문은 최부와 같은 성종대 사림이 추구한 이상적인 인재관을 알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성종 17년 重試 책문을 통해 요순시대를 이상세계로 추구하고 있으며, 한당 시대...
TAG 조선 성종, 최부, 책문, 대책, 주자 성리학, 사림, 인재관, King Seong-Jong in Joseon dynasty, Choi-Bu, 崔溥,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s, 科擧, exam questions, 策問, answer of examination, 對策, Neo-Confucianism, 朱子性理學, Ideal model of Talented
은진송씨의 수원 만의 세거과정연구
柳俊相 ( Yoo Joon Sang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8] 제49권 229~257페이지(총29페이지)
은진송씨의 수원만의에서의 세거에 대한 연구는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 명하였다. 첫번째는 은진송씨의 만의 세거배경을 다루었다. 수원 만의는 송시열 이 서울과 회덕을 오가며 머물던 장소였으며, 근기지역에 거주하는 문인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거점이었다. 또한 갑인예송, 현종·인경왕후·명성왕후가 죽었을 때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였다. 또한 용인의 심곡서원과 충렬서원에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매곡서원의 건과 도봉서원의 송시열 향사는 송시열 후손의 경기세 거에 바탕이 되었다. 두 번째는 송시열 후손들의 경기세거이다. 송회석은 송시 열의 손자 중 유일하게 수원 만의에 묘가 들어섬으로서 송시열 후손의 경기세 거의 단초를 마련하였다. 송무원은 외가가 있는 양평에서 성장하고 여주에서 세 거하였다. 송덕상은 만산정사를 세워 수원 만의의 세거를 시작하였다. 송덕상은 이재, ...
TAG 은진송씨 경기세거, 수원만의, 송시열, 송회석, 송무원, 송덕상, Gyeonggi living of Eun Jin Song, s family, Suwon man-i, Songshiyeol, Songhoeseok, Songmuwon, Songdeoksang
18세기 후반 서명응(徐命膺)의 『본사(本史)』 편찬과 『본사(本史)』의 구성 체제
廉定燮 ( Yeom Jeong Sup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8] 제49권 259~287페이지(총29페이지)
徐命膺이 편찬한 『本史』는 『보만재총서』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重農의식과 農學을 家學으로 삼은 학문적 바탕을 토대로 『본사』를 편찬하였다. 그는 농정, 농사에 관련된 사항을 史書의 紀傳體 형식으로 새롭게 구성하여 『본사』를 편찬 하였다. 八穀을 本紀로 삼고 있고, 八穀이 세상에 나오게 만드는 일과 관련된 것 은 志로, 채소와 과실과 관련된 것을 世家로, 그리고 樹木, 草卉, 藥材 등 그 밖 의 식물들은 列傳으로 정리하였다. 『본사』의 農書로서의 성격에 대해서 검토할 때 보다 깊은 분석이 필요한 부분이 바로 ‘九志’였다. 九志마다 각 志의 서술 배경, 서술 목표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짤막한 引에 해당하는 글이 붙어 있다. 九志의 引을 검토하여 『本史』의 성격, 내용 서술의 특징을 찾아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로 서명응은 『본사』 편찬을 통해 ...
TAG 徐命膺, 本史, 九志, 農書, 農學, Seo Myeong-eung, Bonsa, Nine Ji, section, Farming Manual, Science of Agriculture
고대 남해(南海) 도서의 유적과 특성
金在弘 ( Kim Jae Hong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8권 1~32페이지(총32페이지)
이 글은 남해 섬과 연안의 유적을 검토하여 그 성격을 밝히고 시기별 변화 양상을 고찰하였다. 그 과정에서 문헌 사료와 고고학 자료를 비교하여 해로를 따라 이루어진 교역 및 교류의 성격을 추출하고 시기별로 달라진 성격을 밝혔다. 삼한시대에 남해의 특징적인 유적에서는 복골과 화폐가 출토되었는데, 중국 漢대의 유물과 관련이 있다. 이것은 서해와 남해의 섬과 연안을 따라 분포하고 있어 요동-낙랑ㆍ대방-마한-변한ㆍ구야국-왜로 이어지는 교역망을 상정할 수 있다. 이 시기 서해와 남해를 잇는 교역은 낙랑과 대방이 주도하였으며, 남해의 교역은 구야국(금관가야)가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다. 삼국시대 전기 남해의 특징적인 유적은 왜와 관련을 가지고 있다. 5세기 전반에는 수혈식석곽묘에 갑주를 부장하여 무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5세기후반에는 횡혈식석실묘에 무기, 장신구...
TAG 남해, 횡혈식석실묘, , 백제, 신라, 교류 Southern sea, a stone chamber tomb with an horizontal passageway, Japanese Wae, Baekje, Shilla, exchanges
고려시대의 도서(섬)의 인식과 개발
洪榮義 ( Hong Young Eui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8권 33~71페이지(총39페이지)
섬은 땅이자 영토의 일부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전근대 왕조에서도 섬과섬 주민을 관리, 감독, 보호해야 했다. 모든 땅이 공유지인 왕토(王土)라는 전근대 왕토사상에 견주어 보지 않더라도 당연히 국가에서 섬의 실태 파악과 이용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때문에 국가의 영토 안에 소속된 섬 역시 왕화(王化)의 대상이다. 궁예정권하의 왕건은 해군대장군(海軍大將軍)으로 진도군(珍島郡)과 고이도(皐夷島)를 점령하여 나주로 이어지는 뱃길까지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해에서 남해로 이어지는 뱃길의 길목인 압해도((壓海島 : 壓海縣)를 장악하고 있던 능창(能昌)을 제압하면서 서남해지역과 해상로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태조는 대표적인 원해(遠海)의 해양세력이 존속하는 우산국(울릉도)과 탐라국(제주)을 복속시켰다. 이로써 동해의 울릉...
TAG 고려·도서, , ·해도, 海島·해도입보·해도개발론, 海島開發論, Goryeo·Island·Ocean Island·Resettlements on the Islands, 海島, 入保·Evacuation Policy of Ocean Island Inhabitants도서정책, 島嶼政策·Policy Issues in Ocean Island
13~14세기 고려와 원제국의 ‘탐라(제주) 정책
李康漢 ( Lee Kang Hahn )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2017] 제48권 73~123페이지(총51페이지)
고려는 국초 탐라와의 관계를 단계적으로 강화해 갔다. 현지세력을 포섭한 후 현령을 설치했고, 타지역에 비해 높은 위상의 외관 및 안무사 또한 파견했다. 탐라와의 경제적 교류도 그에 조응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활발해졌다. 탐라인들의 내륙 방문양상은 단순 방물진상에서 송상형 방문교역 형태로 진화해 갔다. 이후 고려정부는 13세기 전·중반 탐라현을 제주목으로까지 격상시켰지만, 그 체제가 정착되기도 전에 몽골침공을 겪었다. 게다가 탐라 현지의 피해는 강화(講和) 이후에 더욱 극심해졌으니, 삼별초의 지배를 받은 데 이어 원제국정부에 의해 일본정벌 준비에까지 동원됐기 때문이었다. 원제국은 한걸음 더 나아가 탐라를 교통요충·교역거점으로까지 인식, 다루가치를 파견해 탐라를 한반도 내륙(전라도) 및 중국 연안(수역)과 연결시켰다. 탐라권역내에서 유통되는 물자들을 징구하는...
TAG 탐라현, 제주목, 원제국, 충선왕, 공민왕, Tamra-hyeon, Jeju-mok, Mongol Yuan Empire, Chungseon-wang, Gongmin-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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