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안동시 도산면은 조선시대 대부분 시기 예안현의 핵심지역에 위치하였다. 이곳에는 고려전기에 건립된 세 개의 중요한 금석문이 있었고 현재는 모두가 현지에서 떠나 다른 지역에 실물의 일부나 탁본이 전한다. 이를 현지에서 조사하여 제대로 평가되도록 촉구할 필요가 있다.
도산면의 기원은 이황은 떠나서 설명하기 어렵다. 이황은 용두산 아래 온계에서 태어나 급제하고 벼슬하던 중반기까지 출생지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생애의 후반에 고향을 중요시하여 가까운 도산 아래 토계에 양진암을 짓고 자신의 수양에 힘썼고 도산서당을 열어서 지역의 교육에 몰두하였다. 이황의 호인 퇴계와 도산은 이웃한 분천과 청량산으로 확대되어 도산면의 기원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
도산면은 낙동강의 상류의 북쪽에 있고 신라의 서울 경주에서 고려와 조선의 수도 개경과 한성으로 가는 지름길에 의하여 ...
김승룡 ( Kim Seung-ryong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20] 제74권 47~69페이지(총23페이지)
이 논문은 침산 이수인의 학문과 사상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스케치를 목적으로 한다. 『枕山隨錄』은 필사본 자료로 남아 있다. 모두 8권으로, 그 안에 詩는 302수, 挽詩 200수, 書 56편, 序 16편, 記 15편, 跋文 7편, 說 6편, 論 6편, 通文 5편, 箴 2편, 銘 9편, 贊 6편, 上樑文 5편, 行狀 5편, 傳 3편, 墓碣銘 8편, 祭文 46편, 告由文 13편, 雜著 8편 등을 수렴해놓았고, 부록으로 枕山에 대한 輓詞, 祭文, 行狀, 墓銘, 訃告錄 등을 수록해놓았다.
침산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의 학문적 논의와 역사의식, 독립운동의 사적을 먼저 고찰할 것이 요구된다. 그러나 이 논문은 침산의 정감세계에 주목하여 다루고자 한다. 가능한 한 침산의 행적과 연계된 시를 중심으로 다루어서, 시를 통해 그의 정...
김종구 ( Kim Jong-gu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20] 제74권 71~101페이지(총31페이지)
紅衣將軍 망우당 곽재우는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하여 큰 공을 세웠지만,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處士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의 한시는 대개 임진왜란 이후 망우정 은거 시절에 지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기존에 우리는 곽재우를 의병 활동과 관련해서만 살펴보았다. 하지만 본고는 의병장 곽재우의 일상과 풍류, 한수작의 정취를 살펴보았다.
곽재우의 한시에 나타난 정취는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낭만적 서정 및 자연과 합일하는 정서를 지녔다. 곽재우는 歸去來하여 뱃놀이를 즐기거나, 산수를 통해 조화와 합일하는 정취를 한시에 드러내고 있었다. 둘째, 곽재우는 자유로운 일상을 즐겼고, 고요한 삶을 통해 깨달음에 나아가고 있었다. 그는 전쟁을 경험했기에 그 누구보다 자유로운 일상에 대한 희망이 컸다. 이러한 삶속에서 그는 지극한 고요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성인의 경...
김공숙 ( Kim Gong-sook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20] 제74권 103~136페이지(총34페이지)
전국 지자체에서 지역 스토리를 활용한 웹툰 개발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 연구는 지역설화 자원을 활용한 지자체의 웹툰 개발의 방향성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2013년부터 2018년까지 개발된 안동 브랜드 웹툰 7편의 스토리텔링 양상과 특징을 분석했다.
안동 브랜드 웹툰의 스토리텔링은 원천설화와 보편적 주제의 충실한 교직, 하회마을과 하회별신굿탈놀이 소재의 다양한 장르 웹툰화, 원천설화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시대의식과 트렌드를 반영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양상을 보인다. 매체전환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볼 때 초기작은 설화의 수용도가 높은 편이지만, 뒤로 갈수록 원천설화의 스토리 변형 강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안동 브랜드 웹툰은 설화적 환상성의 구현, 다층적 융합의 스토리텔링 등 기존의 고전 서사 활용 웹툰 스토리텔링 방식을 재현한다. ...
한길로 ( Han Gil-ro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20] 제74권 137~164페이지(총28페이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수많은 민중들과 유림들이 이에 저항했다. 구한말 한주학파(寒洲學派)를 이끈 이진상(李震相)의 아들 이승희(李承熙) 역시 이등박문으로 대표되는 일본 세력과 을사오적과 같은 매국대신을 매섭게 성토하며, 오적(五賊)을 척결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올리려 상경했다. 하지만 이후, 대구경무서(大邱警務署) 소속의 순사(巡査)와 순검(巡檢)의 손에 이끌려 1905년 12월 6일(음력) 대구옥(達狴)에 갇힌 수인이 된 이승희는 이듬해 4월 7일까지, 약 103일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달폐일기』는 수인이 된 그가 ‘대구옥’에서 경험한 것들을 담고 있다. 『달폐일기』는 일기라는 표제와 형식을 갖고 있지만, 보통의 일기와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하루하루의 일과 그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차분하게 ‘기록’하여 소장하려는 의지보다는, ...
徐榮敎 ( Seo Young-kyo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20] 제74권 165~191페이지(총27페이지)
660년 7월 18일 羅唐연합군이 泗沘城을 함락시켰다. 하지만 9월 3일 蘇定方이 10만 군대와 함께 철수하자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났다. 661년에 들어서 唐軍 1천이 전멸했고, 古泗에서 신라군이 패배했다. 그곳은 倭의 병력과 군수물자가 하역되는 항구와 요새들이 위치했다. 『資治通鑑』(661년 3월 조)과 「답설인귀서」(661년 2월)를 비교하면 古泗‘지역’(平倭縣;古阜)에 周留城이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라와 웅진도독부 사이의 병참선은 단절과 개통이 수차례 반복되었다. 662년 7월 劉仁軌와 金欽純이 마지막으로 보급로를 개통시켰다. 이때 김흠순은 19명의 장군을 거느린 신라군의 수장이었다. 『資治通鑑』(661년 3월 조)에서 金欽(純)을 신라 대표 장군으로 기록한 것도 이
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김흠순은 전투를 통해 신라의 陸路보...
강윤정 ( Kang Yoon-jung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20] 제74권 193~222페이지(총30페이지)
비록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대구ㆍ경북여성들은 1919년 3ㆍ1운동에 참여하였다. 도시지역인 대구에서는 여학교 단위의 3ㆍ1운동이 전개되면서,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운동의 주도층으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기독교계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진다는 특징을 보인다. 특히 남편이나 一家 전체가 만세시위에 참여하자, 여성들도 함께 참여한 사례도 있다. 한편 양반가의 여성으로 3ㆍ1운동에 참여한 김락과 남자현의 경우는 가족이 항일투쟁에 참여한 前史를 가지고 있다는 특징을 보였다. 또한 대구출신의 기생으로 서울에서 3ㆍ1운동에 참여한 정칠성과 같은 인물도 있다.
3ㆍ1운동에 참여한 경험은 이후 항일투쟁과 여성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3ㆍ1운동에 참여한 남자현은 만주로 망명하여, 무장항일투쟁과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한연순과 김정희 등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으...
박충환 ( Park Choong-hwan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20] 제73권 7~58페이지(총52페이지)
최근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수준의 행정단위를 공간적 매개로 하는 ‘자문화연구’ 지역학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국내 지역학 열풍의 시기에 수많은 자문화연구 지역학 분야 중 하나로 자리매김해온 영남문화연구원의 영남학을 지구화시대의 글로컬 문화지형과 지역학의 이론적·방법론적·인식론적 쟁점이라는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조명해보는 데 있다. 이를 위해 영남문화연구원 설립 후 약 20년 동안 간행된 78편의 저역서, 연구원이 수행해온 연구 프로젝트, 그리고 연구원의 학술지인 『영남학』 70호까지 게재된 논문 437편을 분석한다. 그리고 그 분석결과를 지역학 일반의 공간성, 총체성, 인식론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한다. 이 연구를 통해 드러난 사실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영남문화연구원의 영남학은 지역학의 공간성과 그것을 둘러싼 이론적·방법론적 문제에...
김영나 ( Kim Young-na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2020] 제73권 59~93페이지(총35페이지)
본 논문은 17~18세기 『소수서원노비안』 등의 고문서를 중심으로 노비의 혼인 및 가족 형태, 거주 지역 등을 밝히고자 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18명의 노비가 있었으나, 17세기에는 134명으로, 18세기에는 380여 명까지 증가하였다. 나이를 확인할 수 있는 노비 중에서 1677년에는 10세 이하가, 1762년과 1783년에는 71세 이상이 가장 많았다. 왜냐하면 1762년과 1783년에는 이전의 소수서원 노비가 모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외거노비는 신공으로 쌀을 냈고, 원촌에 거주하면서 신역을 담당한 노비와 원노와 양녀의 소생, 서원에 임시로 소속된 노비는 콩을 납부하였다. 따라서 소수서원 노비는 院村에 거주하면서 서원의 일을 하더라도 신공도 함께 담당하였다.
소수서원 노비의 혼인은 전체적으로 미상과 원비의 혼인이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