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    
발행기관
간행물  
발행연도  
발행기관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515 개 논문이 검색 되었습니다.
任義伯(1605~1667)의 활동과 『今是堂燕行日記』
김철웅 ( Cheol Woong Kim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2011] 제19권 379~408페이지(총30페이지)
현재 남아 있는 연행록은 거의 600종에 달하는데, 아직 발굴 소개되지 않은 것도 많을 것이다. 본고가 다루고자 하는 연행록은 아직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任義伯(1605~1667)의 『今是堂燕行日記』(乾)이다. 今是堂 任義伯은 현종 5년(1664, 강희 3)에 副使로서 북경을 다녀왔다. 정사는 우의정 洪命夏였다. 이들이 파견된 것은 전년도에 있었던 유황 밀수의 처리 문제 때문이었다. 임의백이 부사로 발탁된 데는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 형조참의로 있으면서 일본·청과 불거진 유황·염초 문제를 잘 해결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홍·임 연행사는 현종 5년 2월 13일에 출발하여 같은 해 6월 13일에 돌아왔다. 이때 임의백은 『금시당연행일기』를 남겼는데, 영평부에 도착한 3월 30일까지 기록한 상권만이 남아 있다. 일찍이 정보 수집의 중요성을 ...
TAG 임의백, 『금시당연행일기』, 연행록, 홍명하, 조선, 강희제, 오삼계, 삼번, Im Uibaek, Yeonhaengrok, Yeonhaeng Ilgi, Joseon dynasty, Qing china, Hong Myeongha, Emperor Kang Hsi, Joseon ambassador
『천의소감(闡義昭鑑)』에 대한 서지적(書誌的) 연구
임기영 ( Kee Young Lim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2011] 제19권 409~469페이지(총61페이지)
조선 후기 당쟁서를 언급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자료 중의 하나가 『闡義昭鑑』과 『戡亂錄』 및 『明義錄』의 간행이다. 이러한 저술들은 한결같이 내적 분쟁의 혼란 속에 이루어졌고, 따라서 그 출판의 동기도 대등소이하다. 그 중 특히, 『闡義昭鑑』은 영조의 집권 중반에 중앙의 집권층에서 반대 세력을 다스리고, 집권층의 대의명분을 표명하기 위한 임금과 중앙 관료들이 이루어낸 의도적인 출판의 결과물이다. 이 연구는 이처럼 영조대에 이루어진 『闡義昭鑑』의 편찬과 간행 과정, 그리고 후속 작업으로 의궤의 작성까지 이어진 조선 후기 관찬서의 출판 과정을 서지적 관점에서 다루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자료의 출판이 이루어지기까지 당시 임금과 중앙 관료들의 구체적인 업무 논의, 진행 절차와 과정을 사료와 관련 기록을 토대로 소급하여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검토 작업...
TAG 천의소감, 闡義昭鑑, 찬수청, 纂修廳, 당쟁, 黨爭, 의궤, 儀軌, 활자, 活字, 조판, 組版, 『CheonEuSoGam』, Chansoochung, Eugye, Party strife, Movable type, typesetting
겸양 대명사 "저" 생성의 과정
이장희 ( Jang Hee Lee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2011] 제19권 471~501페이지(총31페이지)
19세기 후반 이전에 겸양 대명사 ``저``는 없었다. 본고는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이것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원인과 생성 경로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생성의 사회적 원인은 노비제도 폐지에 따른 하층민의 신분상승이 언어로 표출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전통시기엔 예속관계(주종관계)의 겸양어로 ``소복(小僕)``, ``소비(小婢)``가, 비예속의 상하관계의 겸양어로 ``소인(小人)``이 사용되었다. 그런데 1894년 노비제도가 폐지되면서 ``소복``, ``소비``도 사라지지만, 실질적 예속관계(주종관계)는 유지되어 대체할 어휘가 필요했다. 이를 대체한 것이 전통기 비예속 관계에 쓰이던 ``소인``이다. 한편 전통기 비예속 관계에 쓰이던 ``소인``이 근대기 실질적 예속관계의 겸양어로 옮겨감으로써 생긴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신어`...
TAG 겸양대명사, , 신소설, 소복, 소비, 소인, 노비제도 폐지, 신분상승, 상황 지시성, Polite Pronoun, Jeo, Sobok(young male slave), Sobi(young woman slave), Soin, the abolition of slave institution
『감계록(監戒錄)』을 통해본 19세기 전반 함창 재지사족의 생활양식(生活樣式)
오용원 ( Yong Won Oh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2010] 제18권 7~39페이지(총33페이지)
이 글에서는 洪洛建(1798-1841)이 30년 동안 그의 내밀한 일상과 친인척 주변사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기록한 생활일기를 통하여 함창 사족의 생활양식을 살펴보았다. 먼저 홍낙건의 가계와 그의 기록의식을 살펴보았고, 『감계록』이 일기 자료로서 갖는 성격도 밝혀 보았다. 이러한 기본적 고찰과 홍낙건의 일상 생활 속에 주어진 환경 조건을 추출하여 한 사족으로서 향촌사회에서 살아가는 방식인 생활양식들을 규명해보았다. 홍낙건은 19세기에 咸昌의 栗里에 거주하면서 관직에 나아간 적도 없었고, 그렇다고 학문을 온축하여 당대에 학자적 명망을 얻었던 적도 물론 없었다. 그의 생애사를 보면, 그는 향촌 사회의 지극히 평범한 사족으로서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며 생을 마친 인물이다. 어쩌면 이러한 계층의 사람들이 조선시대 향촌사회를 주도하고 움직였던 저층의 구성원들인지도...
TAG 홍낙건, 일상, 생활양식, 함창, 문중사, 일기, 고문서, 물가, 『감계록』, Hong Nak-geon, daily Life Life style, hamchang, clan`s affairs, diary, antique document, price, 『Gamgyerok』
선유(船遊)를 통해 본 낙강(洛江) 연안지역 선비들의 집단의식-17세기 한려학인(寒旅學人)을 중심으로-
김학수 ( Hak Su Kim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2010] 제18권 41~98페이지(총58페이지)
洛江은 영남 사람들의 삶의 공간이자 학술과 문화, 정보가 유통되는 거대한 소통의 장이었다. 특히, 16세기 이후 사림파의 성장과 더불어 낙강은 이른바 강거문화와 접목되어 누정들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그러한 누정들은 영남 선비들의 학술문화 공간으로 기능했다. 교유 또는 종유로 불리는 사귐의 문화를 중시했던 사림들은 詩會, 遊山, 船遊, 講會 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친분과 정리를 다졌고, 학문을 주고 받았다. 강회가 선비로 행세하기 위한 학문적 일상이었다면 시회, 유산, 선유는 학문적 원기를 재충전하는 휴식의 과정이자 서로간의 연대와 결속을 강화하는 단합의 자리였다. 낙강에는 저 아득한 옛날부터 배가 다녔고, 또 배를 매개로 한 놀이문화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변 경관 및 누정으로 대표되는 학술문화공간과 접목된 ``뱃놀이문화``가 활성화 된 것은 조선시대였다....
TAG 선유, 船遊, 한려학인, 寒旅學人, 낙강, 洛江, 금호선사선유, 琴湖仙査船遊, 용화선유, 龍華船遊, 봉산욕행, 蓬山浴行, 개진선유, 開津船遊, 완락재, 玩樂齋, 부강정, 浮江亭, 어목정, 漁牧亭, 정구, 鄭逑, 장현광, 張顯光, 서사원, 徐思遠, 조임도, 趙任道, 배상룡, 裵尙龍, 허목, 許穆, boating, Nakdong River, Jeonggu, Jang HyeongWang, Yonghwa Seonyu, Hanryeo Hakin
영남선비들의 구곡경영과 최남복의 백련서사
이종호 ( Jong Ho Lee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2010] 제18권 99~158페이지(총60페이지)
주희의 무이구곡 경영과 「무이도가」가 조선에 소개된 이후 한국의 구곡문화가 전개되었다. 초기 구곡문화의 전개는 15세기 영남사림파의 형성과 연계되어 있다. 성리학적 세계관을 공유한 영남사림은 은둔과 소요의 공간으로 구곡원림을 기획했다. 아울러 문학이나 회화, 건축 등을 통하여 구곡경영의 의의를 부각시켰다. 조선의 구곡문화는 조선중기 퇴계 이황을 만나면서 몇 가지 주요한 특징을 드러낸다. 이황은 구곡을 이상과 현실의 조화에서 이해했다. 도가적 별유천을 부정하고 현세에서 이상향을 찾으려했다. 이황은 주희의 「무이도가」가 주로 경치를 노래한 것으로 보아 도학적 의미를 크게 부여하지 않았다. 이황은 「무이도가」를 차운하고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원림을 경영하여 영남학파 구곡시가 창작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율곡 이이는 직접 석담에서 구곡원림을 경영하면서 「고산구곡가...
TAG 무이구곡, 영남선비, 이황, 이이, 이상정, 최남복, 백련구곡, 백련서사, 연화동천, 이상향, 명철보신, 구곡문화, Muyi-gugok, Yongnam-sunbi, Yi whang, Yi yi, Yi Sang-jung, Chae nam-bok, Backryen-gugok, Backryen-seosa, Ryenhwa-dongchun, Utopia, Myungchulbosin, Gugok-culture
정원을 통해 본 영남선비의 사유양식(思惟樣式)과 가치지향(價値志向) -연못을 중심으로-
윤호진 ( Ho Jin Yun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2010] 제18권 159~211페이지(총53페이지)
이 글에서는 특별히 영남의 선비들이 연못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연못과 그 주변의 사물에 대한 감상은 어떠하였나, 더 나아가서 이들에 대해 선비들은 어떠한 가치를 지향하고 있었던가를 차례로 살펴볼 것이다. 여기에서는 특히 연못이란 것이 조성하기도 쉽지 않고, 어렵사리 만들어놓아도 관리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영남의 선비들이 무엇 때문에 연못을 굳이 마련하려 들었고, 연못을 통하여 무엇을 추구하고자 했던가를 밝혀보고자 한다. 선비들이 연못을 무엇으로 인식하였던가 하는 점은 오늘날의 조경학적관점에 머무르지 않고 매우 다양하다. 물론 연못을 아름답게 꾸미고 이를 감상하는 것이 기본이겠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여름날 더위를 식히거나 풍수상의 이유와 같은 실용적인 관점, 선비들이 연못을 풍류를 즐기는 것과 같은 고상한 취향을 위한 ...
TAG 정원, 연못, 연꽃, 물고기, 선비, 영남선비, 강호, 정우, 거울, 마음의 고향, 군자의 벗, 흐림이 없는 마음, ponds, pond, gardens, Lotus, hometowns, mirror, Living spaces, style of thought, intention of value, Yeongnam scholars
조선시대 분재문기(分財文記)의 작성과정과 그 특징 -초문서원문서복문서(草文書原文書複文書)의 제작과 수취를 중심으로-
문숙자 ( Sook Ja Moon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2010] 제18권 215~248페이지(총34페이지)
본고는 조선시대 재산상속 문서인 분재기의 작성과 受取에 나타나는 사회사적 의미를 살펴보기 위하여 작성하였다. 분재기의 제작은 財主라 칭해지는 피상속인이 분재내역을 구술하고, 필집 혹은 상속인 중 한 사람이 그것을 書取하는 과정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그 안에는 草文書라 지칭되는 초본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原文書로 정제되는 몇 단계의 제작과정이 숨어있다. 또 초문서는 두 가지의 형태가 있는데, 하나는 정제과정을 거쳐 원문서로 화하는 초본 형태의 문서이고, 다른 하나는 원문서를 만들기 위한 대본 역할을 하는 재산목록 형태의 전혀 다른 형식의 문서이다. 각 가문의 재산관리 방식에 따라 분재기 제작과정이 달라지고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형태의 초문서가 만들어진다. 즉 분재기 작성 방식에는 상속 주체들의 재산운영의 내용들이 숨어있다. 한편 분재기의 受取는 재산상속과...
TAG 분재기, 초문서, 草文書, 원문서, 原文書, 상속인의 층위, 복문서, 複文書, Bunjaegi, property inheritance documents, the primary documents, the completed documents, hierarchy among the heirs, the plural documents
역서(曆書)의 네트워크: 왕의 시간과 일상생활
김혁 ( Hyok Kim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2010] 제18권 249~291페이지(총43페이지)
曆書는 조선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이 글에서는 역서를 발간자인 國王과 수요자인 臣民과의 관계를 직접 연결시켜 이해할 수 있는 해석의 장소로 간주한다. 당시 수직적 신분 위계에 속하였던 수요자들의 역서 네트워크를 분석하여 국왕의 권력이 기원하는 곳과 일상생활에 침투하여 전개되는 양상을 해명하는 것이 이 논문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역서는 조선국왕에게 兩價적인 함의가 있었다. 중국과의 책봉관계를 인정하는 상징물인 동시에, 자신의 주권 하에 있는 時空間을 조직하는 정치도구였다. 특히 정치 도구로서 역서를 이용하고자 하였던 국왕의 의도는, 중국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현실에 맞는 독자적인 측후를 반영한 鄕曆을 계속 발간하고자 하였다는 데에서 드러난다. 이와 같이 조선 국왕이 역서를 맺는 새로운 네트워크 방식을 통해 그는 관료제의 기반이 되는 통일성과 소통을 위한 ...
TAG 역서, 曆書, 다각적 이용 양상, , 관료, 사족, 농민, 農民, 책봉, 冊封, 향력, 鄕曆, 관상수시, 觀象授時, 네트워크, 역서의 생산량, 일상생활, 신분 위계, 왕력, 王曆, 민력, 民曆, Almanac, Calender books, the study of calender, yeokhak 역학, 曆學, the annotation of calendar, yeokju 역주, 曆註, king`s time, everyday Life, Jung Yakyo
18~19세기 영천(永川) 정세아(鄭世雅) 후손들의 청시(請諡)와 문중(門中) 활동
김명자 ( Myung Ja Kim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2010] 제18권 293~325페이지(총33페이지)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조선후기 영남 사족사회에서 請諡가 활발했는데, 그들은 왜 諡號를 청원했는가, 조상의 시호를 받기 위해 후손들은 어떤 노력을 했는가, 청시의 전개 과정은 어떠한가, 조상에게 내려지는 시호가 후손들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등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영천의 烏川鄭氏가 그들의 先祖 鄭世雅 · 鄭宜藩父子에 대해 청시한 사례를 살폈다. 여기서 다룬 내용과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오천정씨는 18~19세기 10여 차례 이상 정세아와 정의번의 諡號와 旌閭를 내려달라고 상소했다. 정세아에게는 ``倡義해서 城을 회복한 功``으로 시호를 내려주고, 정의번에게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아버지에게 효도한 功으로 정려를 내려달라고 했다. 반세기에 걸친 수 차례의 상소로 정의번에게는 1784년 정려가 내려졌고, ...
TAG 오천정씨, 烏川鄭氏, 정세아, 鄭世雅, 정의번, 鄭宜藩, 시호, 諡號, 청시, 請諡, 정려, 旌閭, 백세부천, 百世不遷, 대종가, 大宗家, 문중, 門中, Ocheon Jeong clan, Se-ah Jeong, Eui-beon Jeong, the posthumous epithet, Asking the government to grant the ancestors the posthumous epithets, eternal, the big head famil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